단기 3921년 선조 21년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난 무인이다.
단기 3925년 선전관으로 공을 쌓아 곡포만호에 특제되어
전선을 만들고 군비를 갖추어
이 충무공 정운 등 다른 의병장 들과 같이
부산 제포,당포에서 연전연승 군공을 세워
좌부장 수문장을 거치고
선조대왕이 그 군공을 가상하여 상작을 내려
단기 3930년 정유에 보성군수로 승배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동년 12월 27일에 전사하여 초혼장을 하였다.
선무원종훈에 녹훈되고 철권을 받았다~김해김씨 삼현 백당공파 인물편에서
1592~1598년 경상우수사 (원균)
미조항진 (첨사 김응함)
곡포만호 김선지는
1592년부터~ 명랑대첩,노량해전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싸우다 결국 노량해전에서
28세에 전사하신 해남군
산이면의 자랑입니다
김해김씨 가문에 전해지는 고문서와 임진왜란,정유재란 이후 군공에 따라
선무원종공신 2등에 분명하게
만호 김선지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명랑대첩은 이순신 장군 혼자 만의 전쟁이 아닌
해남군 산이면의 의병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이룬 대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전언에 따르면 의병들을 모아서 어선을 군선으로 위장해서 명랑대첩에 참여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1570년 1월 10 전남 해남군 산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1588- 3921선조 21년 무자(19세) 권무과 무과에 급제 했습니다
1589~1592 선전관?
1592-3925년 선전관으로 입대 (23세)-족보
호가용만이 지용초중 =선조를 의주 용만까지 가마를 호위
용만이란?
선조가 의주로 몽진해서 국정을 처리하던 곳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가 보낸 은 20,000냥을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이 가지고 오자,
직접 나가서 영접하고 용만관으로 와서 의례를 준행하였다 선조실록』 25년 6월 24일 선조는 또 임진왜란 발발 후 의주로 피난하였을 때 용만관에서 국정을 처리하였다
선전관
조선시대 왕의 측근에서 왕명 출납과 군무(軍務) 처리 등을 맡던 무반 경관직(京官職).
특별히 왕의 측근에서 왕명 출납을 맡아 서반(西班)승지(承旨)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시되었다. 본래 무예와 강서(講書) 시험을 통과한 문무 겸비자로 제수되었다. 선전관을 역임한 경우에는 공신(功臣) 자제들처럼 아들에게 음서 취재(取才)가 허용될 만큼 우대받는 관직이었다.선전관은 사수(仕數), 즉 근무한 날이 720일이 되면 교체하도록 하였다
1592-3925년 선조 25년 임진년 선전관으로 공을 쌓아 곡포만호에 특제되셨다
곡포만호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미조항진 (첨사 김응진)에 속한 곡포보에 해당된다
곡포 만호 재임표
곡포만호 충무 이순신 충장 정운 (사도)첨사김완 연승대첩
곡포보(김선지만호)는 미조항진(첨사김응함)에 속하고 경상우수사(원균)에 속해 만호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셨지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1592년 23세~1598년 29세까지 수 많은 수군 전투에 참여하였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셨다고 하지만
족보에는 1597년 전사하신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로
이순신장군의 휘하 장수들도 거의 대부분 만호의 신분으로 임진왜란에 전공을 세웠지만
곡포만호 김선지는 경상우수사에 속해 있어
원균의 성품과 행실을 신뢰하지 못한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 원균장균의 휘하의 장수들은 대부분 만호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무과 급제 만호로써 같이 전공을 세운 것은
확실합니다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어 있다는 것이 증거입니다
만호는 직급상-품계상으로는 현령, 현감 보다 높지만
실질적인 대우는 현령, 현감 이하였습니다
곡포만호 김선지는 보성군수 안홍국처럼 선조를 호위해 의주까지 갔다가 경상우수사에 발령을 받고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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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국 보성군수-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신경(藎卿). 찬성사 안문개(安文凱)의 9대손이다. 1583년(선조 16)에 두 형과 더불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따라갔으며, 왕명을 받들어 각 진(鎭)을 다니며 왕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 해 3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 등으로 전공을 세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안홍국(安弘國))]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수사 원균이 함께 한 사실을 알 수 있듯이
만호 김선지도 함께 이렇게 많은 전투에 참여하셨고
적어도 명랑해전에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판옥선에서
이순신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선지 부친 김안방을 비롯해서 김안우 김연지 김정지 등 온 집안이
명랑대첩에 집중해서 이순신 장군을 도왔습니다
족보에는 부산 제포 당포에서 연전연승 군공을 세워 주부장 수문장을 거치고 선조대왕이 그 군공을 가상하여 상작을 내려 단기 3530년 정유에 보성군수로 승배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동년 12월 27일에 잔사하여 초혼장을 하였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安邦은 일찍이 趙憲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으며,인근의 牛山 安邦俊, 松湖 白振南 등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그는 壬亂이 일어나자 海南縣監 邊應井, 義兵將 高敬命 등과 함께 金山전투에 참여하였고,
丁酉亂에는 從弟인 安宇와 함께 李舜臣의 鳴梁海戰에 참여하여 軍糧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또한 丙子亂시에는 安宇, 次子 鍊之와 함께 礪山에 모여 창의하였다가 화의가 성립함을 듣고 돌아왔다.
이 때 安宇는 軍需米로 太 60餘石과 그외 軍器, 布木 등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李适의 亂에에는 銑之가 창의하였다.
安邦, 安宇, 銑之 등이 지방사족으로서 창의한 반면 당시 安邦의 長子 銑之는 관군으로서 공을 세웠다.
그는 宣傳官으로 재직하고 있던 중 임란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왕명으로 曲浦萬戶로 임명되어 李舜臣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는 閑山, 釜山薺浦, 唐津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뒤에는 宣武原從功臣에 錄勳되었다
.★ 註 4) 뒤에 安邦, 安宇, 銑之, 鍊之를 위해서는 金載一과 洛一 등이
1801년에 해남에 노송정(倡義祠)를 건립하여 이들을 모셨다.
1593년 선조 26년 전력부위 수문장 임명 됩니다
萬曆21年(1593)4월 모일에 兵曹에서 曲浦萬戶金銑之(1570~97)에게 내린 告身이다. 같은 달 초6일에 내려진 宣祖(재위 1568~1608)의 명을 받들어 展力副尉守門將에 임명한 내용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김선지는 宣傳官에 재직 중이었다.
곧 곡포만호에 임명되어 이순신(1545~98)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렇게 세운 軍功으로 賞職을 받은 것이 본 고신의 내용이다. 종9품 展力副尉에 오르고 守門將에 임명되었는데,
이를 ‘超敍’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단계를 뛰어넘은 특진인 모양이다.
수문장은 西班 4품 이상 중에서 추천을 통해 임명되었는데 당초 20인이었던 것이
왜란 당시에는 430인에 이르기도 하였다.😊😊

萬曆21年(1593)4월 모일에 兵曹에서 曲浦萬戶金銑之(1570~97)에게 내린 告身이다. 같은 달 초6일에 내려진 宣祖(재위 1568~1608)의 명을 받들어 展力副尉守門將에 임명한 내용이다. 원문이미지의 왼편이 해당 이미지이다. 두 점의 고신이 하나의 종이에 배접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마이크로필름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어 배접이 근간에 이루어진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김선지는 宣傳官에 재직 중이었다. 곧 곡포만호에 임명되어 이순신(1545~98)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이렇게 세운 軍功으로 賞職을 받은 것이 본 고신의 내용이다. 종9품 展力副尉에 오르고 守門將에 임명되었는데, 이를 ‘超敍’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단계를 뛰어넘은 특진인 모양이다. 수문장은 西班 4품 이상 중에서 추천을 통해 임명되었는데 당초 20인이었던 것이 왜란 당시에는 430인에 이르기도 하였다.
김선지는 이러한 전공으로 후에 宣武原從功臣에 錄勳되었다. 沿海인 海南사람이었던 탓에 오늘날 경상남도 남해군에 있는 곡포의 만호에 임명되었고, 閑山, 釜山 薺浦, 唐津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의 高祖 金河(1494~1555)는 士禍로 말미암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가운데 유모를 따라 해남으로 이주하였다. 戊午士禍( 1498년) 당시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진 金馹孫(1464~1498)이 그의 숙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入鄕 이래로 金海金氏 일가는 그곳 산이면일대에 世居하였다.
「海南 金海金氏所藏 古文書와 黙軒日記」, 김문택, 『고문서집성 39: 해남 김해김씨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역사상 최초의 함포해전..진포해전 그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임진왜란 15] 당항포해전!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합류 (tistory.com)
1594년 당항포 해전 당시
전라우수군 이억기 전함 25척
전라좌수군 이순신 전함 23천 거북선 2척
경상우수군 원 균 전함 3척(임진왜란 초 전함 70~100척 자침)
경상우수군 전함 3척 중 미조항진 첨사 김응함의
함선에 김선지만호가 함께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옆은 명랑해전에 참전한 주요인물 표입니다
당항포해전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압도적인 일본군의 군세 앞에 순식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은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가 도주하였으며, 경상좌수사 박홍(朴泓)도 휘하 군세를 결집하지 못하고 본영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적절한 초기 대응을 보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원균은 전쟁이 발발하자 급한 대로 전선을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자신의 휘하 수군을 결집하는 데 실패하였다.
결국 그는 본영을 우후(虞侯) 우응진(禹應辰)에게 맡겨 관고(官庫)를 불태우게 하고, 자신은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포만호(永登浦萬戶) 우치적(禹致績), 소비포권관(所非浦權管) 이영남(李英男) 등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4척의 배를 거느리고 곤양(昆陽) 해구(海口)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경상우수영 관할 지역의 방어체계는 와해되었다.
비록 이순신보다 늦게 부임하여 경상우수영을 정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휘하 세력을 결집하지 못한 것은 명백히 그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원균은 남해(南海)로 이동하여 일본군을 피해 상륙하려 하였으나, 이운룡의 진언을 받아들여 이영남을 보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이후 원균은 한산도(閑山島)로 이동하였다가, 5월 6일 판옥선(板屋船) 1척을 타고 이순신과 합세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남해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미조항첨사(彌助項僉使) 김승룡(金勝龍),평산포권관(平山浦權管) 김축(金軸), 사량만호(蛇梁萬戶) 이여념(李汝恬),소비포권관 이영남,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 한백록(韓百祿) 등 그의 지휘 하에 있는 장수들도 각각 배를 타고 이순신 함대와 합류하였는데,
그 전력은 총 판옥선(板屋船) 3척과 협선(挾船) 2척이었다.
전라좌수영 함대와 합친 연합함대의 전 병력이 판옥선 28척, 협선 17척이었음을 감안하면, 원균의 함대는 매우 열세였음을 알 수 있다.
1595년 을미(乙未)년 선조 28년 단기 3928년 좌부장 위 수문장 (족보)
족보에는 을미년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고신서류와 차이가 있다
萬曆31年(1603)9월 모일에 兵曹에서 守門將金銑之(1570~97)에게 내린 告身이다. 무려 4년 전인 만력27년(1599)2월 22일에 내려진 宣祖(재위 1568~1608)의 명을 받들어 軍功으로 賞職 秉節校尉龍驤衛左部將을 내린 임명장이다.
본 고신이 발급된 1603년은 모두 그의 死後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병조에서 빈 임명장을 전달하는 것으로 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1597-3930년 선조 30년 정유 12월 27일 군의 공을 인정해서 보성군수 승배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여 초혼장을 하였다고 족보에는 전한다
의주 용만까지 선조를 호위한 공이 있어 윤두서의 추천으로 보성군수에 승배되었으나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여 초혼장을 했다고 하는데
아래의 예를 보면 보성군수가 수시로 바뀌고 힘든 곳임을 알 수 있다
족보에서 전사시점을 정유(1587년)라고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정유년인지
정유재란(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음력) 새벽),12월 16일(양력) 에 해당되는건지
알 수 없으나 묘문 등 에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것으로 적혀 있어서
확인하기는 어렵다
호종용만 등 선조를 의주까지 호위한 공으로 보성군수로 승배된 이유로
윤두서의 추천이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확인이 어려우나 창의서적에 적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김연우의 경우 윤선도가 해남현감에게 추천했다고 전해지는 등
해남윤씨와 더불어 남인계열에 속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실록에서는 보성군수가 수시로 바뀐다
1597년 안홍국안골포海戰(1597)에서 戰死
1597년 반혼(潘混) 居濟 武科 丈人 崔廣淵(1521년생)
1598년 전백옥(全伯玉) 甘泉 武科
1599년 김극제(金克悌) 蔚山 武科
1601년 손경지(孫景祉
선무원종공신녹권 2등에 만호 김선지 (41)라고 있다
명량대첩 당시 경상우수사 우도 수영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배설은 회전 직전 도주.
미조항 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 - 전선 1척 (일기)=곡포만호 포함가능성
영등포 만호 척후장 조계종(趙繼宗)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32])
안골포 만호 우수(禹壽) - 전선 1척 (일기)
거제 현령 안위(安衛) - 전선 1척 (일기 / 선조 실록)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 - 전선 1척 (일기)
미조항진에 파견된 수군첨사는 남해·상주포·사량·당포 등지를 관할하였다(『중종실록)
곡포보성은 경상우수영의 속진인 미조항진에 상주포와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
경상우수영 관하의 4진영등포(永登浦)ㆍ상주포(尙州浦)ㆍ곡포(曲浦)ㆍ풍덕포(豊德浦)이 이에 해당된다.
(곡포만호전력부위 수문장 만호김선지 노량해전까지 생존 )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휘하
경상우수사 원균 휘하
미조항 첨사 중군장 김응함(金應諴)의 휘하에
수문장 만호 김선지로 노량해전까지 참전하시다가
전사하셔서
선무원종공신 2등에 만호로 녹훈되신 것으로 추정되며
원균과 김응함의 나쁜 이미지에 의해 전공이 가려져 있다고 추정됩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원균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읽을 수 있고
명량대첩의 중군장 김응함은 노량해전에서도 전공을 세우지만
선조의 의심을 받으며 실록 등 인정을 받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또한 원균의 친척인 윤두서의 추천으로 보성군수로 추천되는 등 남인 계열로 볼 수 있어 당쟁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윤두서는 인척인 원균이 고금에 없는 명장이라며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습니다
미조항 첨사 (안동)김응함(金應緘) 공적 제외 엄격한 공적 관리
1554년(명종 9)~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여삼(汝三)이다. 본관은 안동(安東[舊])이다.
부친은 인의(引儀) 김침(金忱)이다.
1583년(선조 16)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태허(金太虛)‧이수일(李守一)‧이시언(李時彦)‧정기룡(鄭起龍)‧한명련(韓明璉) 등과 함께 여러 전쟁에 참전하여 공적을 세웠다. 대동찰방(大同察訪)으로 재직 중, 순안진(順安陣)에 가담하여 공적을 세웠고, 또한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중군(中軍)을 맡아서 노량대전(露梁大戰)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이후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선조는 한산(閑山)전투에서 패전한 자에 대해, 그 실정을 자세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 결과 당시 그는 병 치료를 목적으로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는 정황이 보고되었다. 애초에 선무공신(宣武功臣) 후보에 선정되었지만, 이러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 군공청(軍功廳) 및 대신들이 질책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그 결과 그의 공적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이 수렴되어, 이수일 등과 함께 공신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