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이찬이네 조상의 발자취

by 김용의 72대 2025. 3. 9.

http://www.yesjokbo.net/jokboroot/user/new_main02-21.asp?default_ja=20241112144811732&default_bu=20241111165931845&viewGubn=jik

http://www.yesjokbo.net/jokboroot/new_default.asp

73대 이찬

72대 용의

71대 천택

子 千鐸(천택)
字는 근대호(根浩)
生1922년壬戌10월4일
配장흥임씨(長興林氏) 父는 정기(丁奇)이고 祖는 태석(台錫)이며 曾祖는 언수(彦秀)이다
生1924년甲子11월6일

 

70대

子 基燦(기찬)
字는 일수(一守)
生1897년丁酉9월5일
卒1928년戊辰11월24일
配여흥민씨(驪興閔氏) 父는 덕식(德植)이고 祖는 영한(泳漢)이며 曾祖는 명호(命鎬)이고 外祖는 장수황석회(長水黃錫淮)이다
生1902년壬寅정월17일
卒1959년己亥정월初8일
墓해남군 산이면 외송리(外松里) 북산(北山) 118번지 유좌(酉坐) 합분(合墳)

 

69대

子 垣(원)
字는 행원(行元)
生철종(哲宗)壬子1852년12월20일
卒1904년甲辰정월29일
配기계유씨(杞溪兪氏) 父는 채환(采煥)이고 祖는 찬주(燦柱)이며 曾祖는 한유(漢宥)이고 外祖는 보성선보여(宝城宣寶汝)이다
卒정월1일
墓해남군 산이면 외송리(外松里) 후등(後嶝) 林848번지내 건좌(乾坐) 쌍분(雙墳)

 

68대

子 熙文(희문)
字는 환여(煥汝)
生순조(純祖)丙戌1826년
卒고종(高宗)辛巳1881년3월20일
墓북산(北山) 선영(先塋)아래 임좌(壬坐)
配경주최씨(慶州崔氏) 父는 명휘(明彙)이고 祖는 치구(致龜)이다
生순조(純祖)乙酉1825년
卒고종(高宗)丙子1876년12월29일
墓진산(珍山) 세치평(世峙坪) 곤좌(坤坐)

 

67대

子 格(격)
字는 치겸(致兼)
生순조(純祖)辛酉1801년
卒갑오(甲午)년6월27일
墓서당동(書堂洞) 유좌(酉坐)
配창녕성씨(昌寧成氏) 인제(仁濟) 희(禧)의 후손이다
生순조(純祖)甲子1804년
卒헌종(憲宗)丁酉1837년3월30일
墓북산(北山)아래 임좌(壬坐)

 

66대 지온: 김낙일,김재일 문과 급제

子 智溫(지온)
字는 원직(圓直)
生영조(英祖)庚寅1770년
卒순조(純祖)乙丑1805년10월26일
配여흥민씨(驪興閔氏) 父는 유현(裕顯)이다
生영조(英祖)乙丑1745년
卒순조(純祖)癸酉1813년9월9일
墓외송리(外松里) 북산(北山) 자좌(子坐) 쌍폄(雙窆)

65대

系子 鑑(감)
生父德祥
字는 성심(聖心)
生영조(英祖)丙辰1736년
卒정조(正祖)丙辰1796년12월22일
配무안박씨(務安朴氏) 父는 성후(聖垕)이고 祖는 태열(泰悅)이며 曾祖는 사빈(思彬)이고 면성군(綿城君) 문오(文晤)의 후손이며 外祖는 선산임석하(善山林碩廈)이다
生영조(英祖)丁巳1737년
卒순조(純祖)庚午1810년4월3일
墓외송리(外松里) 안산(案山) 신좌(辛坐) 쌍분(雙墳)

 

64대

子 德祖(덕조)
덕상(德祥)의 아들을 후계로 삼았다
字는 술용(述用)
生숙종(肅宗)丁丑1697년정월2일
卒영조(英祖)壬辰1772년4월11일
墓선영(先塋) 동원(東原) 남변(南邊) 경좌(庚坐)
配원주이씨(原州李氏) 父는 천징(天澄)이고 祖는 사총(思聰)이며 曾祖는 시준(時俊)이고 外祖는 경주이유지(慶州李惟智)이다
生숙종(肅宗)甲戌1694년9월1일
卒정조(正祖)己亥1779년정월6일
墓남편묘(府君位)오른쪽 경좌(庚坐) 쌍분(雙墳)

 

63대

子 萬瑞(만서)
字는 자징(子徵)
生현종(顯宗)庚戌1670년9월8일
卒영조(英祖)戊午1738년10월15일
配창녕조씨(昌寧曺氏) 父는 여정(汝禎)이고 祖는 익성(翊成)이며 曾祖는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 벼슬을 지낸 복륭(復隆)이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계룡(繼龍)의 후손이며 外祖는 참봉(參奉) 벼슬을 지낸 도강조국헌(道康趙國憲)이다
生현종(顯宗)庚戌1670년9월20일
卒영조(英祖)庚午1750년4월29일
墓군(郡)서쪽 30리정도 외송리(外松里) 안산(案山) 유좌(酉坐) 쌍분(雙墳)

 

62대

子 章赫(장혁)
字는 문백(文伯)
生천계(天啓)5년인조(仁祖)乙丑1625년11월15일
건촌(乾村)에서 본면 외송리(外松里)로 이거(移居)
卒숙종(肅宗)己卯1699년12월16일
配창녕조씨(昌寧曺氏)
卒숙종(肅宗)丙寅1686년정월17일
墓이목정(梨木亭)위 대로변(大路邊) 부모님묘(考妣位墓)오른쪽 자좌(子坐) 합폄(合窆)
系配창녕조씨(昌寧曺氏)
卒숙종(肅宗)戊子1708년10월21일
墓이목리(梨木里) 마산면 금자리(今子里) 경계산(境界山) 간좌(艮坐)

 

61대

子 勛最(훈최)
字는 무사(懋四)
號는 서호(西湖)
生만력(萬曆)35년선조(宣祖)丁未1607년
◎어릴 때부터 단정히 앉아 글을 읽으며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모두 경탄해 마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에서는 부모님을 섬기며 나머지는 모두 소학(小學)의 학문 연마에 온 힘을 다하였다 자라서는 태백산(太白山) 속에 들어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에게 수업을 받았다 문장과 경서(經書)에 대해 정밀하고 널리 알았다 천거 받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도백(道伯) 이성방(李性昉)이 효도와 학문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효종(孝宗) 병신년(丙申) 참봉(參奉)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6품관(六品官)으로 불렀으나 등대(登對 어전에 나아가 면대(面對)하는 것)하고는 돌아와 연구하고 학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서호(西湖)의 향당(鄕黨)에 살면서 스승으로 존경받았다
【원문】
自幼端坐讀書終日不輟人皆敬嘆之天性至孝居家事親皆從事小學矣及長入太白山中受業於淸陰金先生尙憲文學精博不求擧薦道伯李性昉以孝學聞于朝 孝宗丙申徵之參奉不起 后以六品官召之登對而歸講學不撤遠方之人聞風負笈者多少居西湖鄕黨莫不尊師之
卒숙종(肅宗)辛酉1681년8월25일 享年75세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配숙부인원주이씨(淑夫人原州李氏) 父는 충달(忠達)이다
生만력(萬曆)戊申1608년4월20일
卒숙종(肅宗)戊子1708년10월11일
墓군(郡)서쪽 20리 황산면 천마산(天馬山) 이목정(梨木亭)뒤 축좌(丑坐) 합폄(合窆)

 

60대   김선지 장군 무과 급제 노량해전 전사

子 鍊之(연지) 
字는 정숙(精叔)
號는 송은(松隱)
生만력(萬曆)5년선조(宣祖)丁丑1577년5월17일
◎어려서부터 소학(小學)을 익히는 데 온 마음을 기울였고

자라서는 일찍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을 쫓아 경의(經義 경전의 뜻)를

널리 토론하였고 친구로 서로 잘 지냈다

을묘(乙卯)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천계(天啓)甲子1624년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신유일(辛惟一)과 더불어 도내(道內) 여러분들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난리를 평정한 뒤에 그만두었다

정묘(丁卯)년 오랑캐의 난이 일어나자 당숙(堂叔) 지촌공(智村公)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였다

숭정(崇禎)庚午1630년 정시문과(廷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억울한 죄를 받아 굴욕을 당하였다

인조(仁祖)가 애석하게 여겨 소학(小學) 1질을 하사하셨다

숭정(崇禎)丙子1636년 오랑캐의 기마(騎馬)가 창궐하여 국사(國事)가 위급하였을 때 장의(掌義)로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여 호남 도유사(湖南都有司)와 호남 의병장(湖南義兵將)이 되었다

곧 모의청(募義廳)을 설치하여 식량을 비축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의병들을 규합하여 동향(同鄕)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윤 적(尹 績)·윤선계(尹善繼) 등과 함께 여산(礪山)에 이르렀다

운암(雲巖) 이흥발(李興浡)과 도내(道內) 오현(五賢) 및 소모사(召募使)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이 공(公)의 군사들의 빈틈없는 기율을 보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세력을 합쳐 행군하는 일정을 재촉하여 청주부(淸州府)에 이르렀는데

화의(和議)가 이미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3일 동안 곡기(穀氣)를 끊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고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과 더불어 즉시 태백산(太白山) 속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청(淸)나라 사람들에게 척화(斥和 화의를 배척함)로 심양(潘陽)에 3년 동안 구류(拘留)당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통곡하는 것을 보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皇明日月暗風沙 임금님의 해와 달이 모래 바람에 어두워지니
擊劍中宵慷慨多 전쟁이 한창인 밤 비통한 마음 그지없다
白首孤臣安所適 백발의 외로운 신하 어디로 가야하나
湖山一路向南斜 고향으로 가는 큰 길이 남쪽으로 뻗어 있네


라 하였다

은둔하기로 마음을 먹고 서호(西湖)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았다

손수 늙은 소나무를 심고 그 집의 편액(扁額)을 노송정(老松亭)이라 하여 자신의 충절을 나타내었다

아침 저녁으로 연기도(燕妓島) 후풍관(候風舘)을 바라보며 조정으로 향하는 옛길을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일찍이 생원공(生員公)이 병이 났을 때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바쳐 수명을 연장토록 하였고

경신(庚申)년 부모의 상(喪)을 당해 슬퍼하기를 예의 규정에 맞도록 하였다

도백(道伯)이 본 수령에게 충효(忠孝)로 천거하게 하여 인조(仁祖)己卯1639년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인조(仁祖)가 특별히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제수하자 공은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마을에서는 모두 충효선생(忠孝先生)이라 불렀다
【원문】
自幼專心小學及長嘗從淸陰金先生尙憲博論經義友相善乙卯登司馬 天啓甲子适變與辛惟一及道內諸公倡義赴亂平亂而止丁卯虜亂與堂叔智村公倡義平亂 崇禎庚午廷試入格寃惡見屈 仁廟愛惜宣賜小學一帙 崇禎丙子胡騎猖獗國事危急倡聲掌義爲湖南都有司及湖南義兵將即設募義廳備 餉辦器械糾合義旅與同鄕進士尹績尹善繼等到于礪山雲巖李興浡道內五賢及召募使畸庵鄭公弘溟見公師律欽嘆不已合勢行軍剋日趲程到淸州府聞和事已成逐三日絶粒北向痛哭與淸陰金先生尙憲即入太白山中不返矣淸人以斥和拘留瀋陽三年而還鄕痛哭賦詩曰皇明日月暗風沙擊劍中宵慷慨多白首孤臣安所適湖山一路向南斜决意遯世卜居西湖手植老松扁其齋寓其節日夕望燕妓島候風舘朝天之舊路多嘆流涕嘗生員公病谻噬指灌血以延餘齡庚申丁內憂哀毁中規道伯本倅薦以忠孝仁祖己卯召以戶曹佐郞不就翌年仁祖特除戶曹參判公即棄官歸鄕鄕黨咸稱忠孝先生
卒숭정(崇禎)辛巳1641년8월8일 享年65세
◎이후에 도내(道內)의 사림(士林)에서 표장을 올려 천거하니 정려문(旌閭門)을 하사하였다
【원문】
追後道內士林表揭褒旌
숙종(肅宗)癸亥1683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墓정조(正祖)에 창의사(倡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配정부인장흥임씨(貞夫人長興林氏) 父는 진영(振榮)이고 祖는 장사랑(將仕郞) 품계(品階)를 받은 순절공(殉節公) 곤(坤)이며 曾祖는 목사(牧使) 벼슬을 지낸 익손(益蓀)이다
生만력(萬曆)己卯1579년2월9일
卒숭정(崇禎)庚辰1640년9월11일
墓군(郡)서쪽 25리 황산면 연호리(燕湖里) 발우산(鉢盂山) 간좌(艮坐) 쌍분(雙墳)이고 비석이 있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 지제교(知製敎) 벼슬을 지낸 나주임한진(羅州林翰鎭)이 짓고 사복시정(司僕寺正) 벼슬을 지낸 안동권혐(安東權馦)이 썼다

 

59대

子 安邦(안방)=선지. 연지
字는 응시(應時)
號는 강서(岡西)
生가정(嘉靖)32년명종(明宗)癸丑1553년11월12일
◎일찍이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경의(經義 경서의 뜻)를 널리 토론하였고

성리학(性理學 인성과 천리에 대한 학문 연구)에 대한 공부에 온 힘을 쏟았고

도학(道學 유교 도덕에 관한 대원칙(大原則)에 통달하였다

틈이 나면 나라의 책수(策數)와 년운(年運)에 대해 매번 말하기를

「임진(壬辰)년이 멀지 않으니 먼저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수리해야 한다」

하고 도끼를 들고 궁궐에 엎드려 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선생을 섬기는 외우(畏友 존경할 만한 벗)들이 이를 허락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묘(辛卯)년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고

이듬해 임진(壬辰)년 왜적(倭賊)이 창궐하여 국가의 운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공(公)께서 바야흐로 의기를 떨쳐 중봉(重峯) 선생과 더불어 적진(賊陣)에 다다랐으나 상복을 벗지 않았고 시묘살이를 등한히 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큰아들 선전(宣傳) 벼슬을 지낸 선(銑)이 함께 충무공(忠武公)의 진영에 다달아 연승(連勝)으로 크게 이겨 공을 세웠다

만력(萬曆)丙子1576년에 사마시(司試馬)에 합격하였고

경술(庚戌)년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장의(掌議 유생의 우두머리 반장)를 지내면서 상소하여 백성들을 질병에서 구제하고 병사(兵事)에 대해 간언하였다

임자(壬子)년 도백(道伯) 윤변(尹忭)이 조정에 천거하여 인조(仁祖)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불렀다

공(公)은 부름을 받았으나 곧 몸을 이끌고 물러났다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증직받았다

또 병자(丙子)년 호란(胡亂)이 일어나 서울을 압박하고 임금이 급박한 지경에 다다랐으나 이때 나이가 80이 넘는 노인이었기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둘째 아들 진사(進士) 연지(鍊之)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도록 명하고

호남 도유사(湖南都有司)가 되어 청주(淸州)까지 올라갔는데 인조(仁祖)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원문】
早遊重峯趙先生門博論經義專心性理之學於道學洞見大原暇及策數年運每言壬辰不遠先鍊兵修武及持斧伏闕上疏事先生以畏友許之未幾辛卯適丁內憂而翌年壬辰倭賊猖獗國步艱難公方欲奮義與重峯同赴賊陣而衰麻不脫廬墓難曠故命長子宣傳銑之同赴忠武公之陣連勝大捷有功 萬曆丙子登司馬庚戌以泮宮掌議上疏救民瘼言兵事壬子道伯尹忭薦于朝 仁祖召以弘文館校理公承召卽引身而退 贈禮曹參議又値丙子胡奴逼京卽赴君父之急而年過八耋老矣無能故命仲子進士鍊之倡義爲湖南都有司赴淸州和成而還
卒숭정(崇禎)戊寅1638년6월30일 享年86세
墓정조(正祖)庚申1800년에 산이면 주성산(周城山)아래 창의사(倡義祠)를 지었고 고종(高宗)戊辰1868년 훼철(毁撤)되었다가 기축(己丑)년에 부설(復設)되었다
配정부인도강김씨(貞夫人道康金氏) 父는 홍우(弘佑)이다
生가정(嘉靖)乙卯1555년3월15일
卒만력(萬曆)庚申1620년9월25일 育3男2女
墓호산(葫山) 선영(先塋)아래 묘좌(卯坐) 쌍분(雙墳)이고 갈석(碣石)이 있다

 

58대 

子 延壽(연수)
字는 복려(福麗)
生중종(中宗)壬辰1532년10월4일
경술(庚戌)년에 음직(蔭職)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 행후릉참봉(行厚陵參奉)을 받았고 갑인(甲寅)년에 예조정랑(禮曹正郞)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을 제수(除授)받았다
卒만력(萬曆)戊子1588년11월9일 享年57세
墓군(郡)남쪽 30리정도 화산면 금성산(錦城山) 남동쪽 하리동(下里洞) 뒷산기슭(後麓) 간좌(艮坐)이고 비석은 은일(隱逸)로 참봉(參奉) 벼슬을 지낸 행주기우만(幸州奇宇萬)이 지었다
配숙부인해남윤씨(淑夫人海南尹氏) 父는 연(衍)이다
生가정(嘉靖)辛卯1531년10월18일
卒만력(萬曆)乙酉1585년11월11일 育2男1女
墓군(郡)남쪽 30리정도 현산면 선은산(仙隱山) 동쪽산기슭(東麓) 대조동(大鳥洞) 신좌(申坐)이고 상석(床石) 망주(望柱)가 있다

 

57대

子 百鎰(백일)
初諱는 일(鎰)
字는 사건(士健)
號는 도촌(道村)
生정덕(正德)8년중종(中宗)癸酉1513년3월7일
가정(嘉靖)戊申1548년에 음직(蔭職)으로 조봉대부(朝奉大夫) 행제릉참봉(行齊陵參奉) 병절교위(秉節校尉)를 받았고 호조참의(戶曹參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卒만력(萬曆)乙酉1585년10월11일 享年73세
配정부인진주하씨(貞夫人晉州河氏) 父는 현감(縣監) 벼슬을 지낸 관(寬)이다
卒만력(萬曆)丁丑1577년9월30일 育3男2女
墓군(郡)남쪽 7리정도 화곡(禾谷) 방축(防築)위 자좌(子坐) 쌍분(雙墳)이고 상석(床石) 망주(望柱)가 있다

 

56대 중시조 김 하 

字는 경호(景浩)
號는 백당(白棠)
生홍치(弘治)4년성종(成宗)辛亥1491년8월15일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유모(乳母) 신씨(申氏)와 더불어 당악(棠岳 : 해남의 옛 이름)으로 옮겨가 남문(南門) 밖 고도촌(古道村)에 집을 짓고 은둔하며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약간의 문적(文籍)들은 현(縣) 서쪽 암석굴(巖石窟)에 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정(嘉靖)丙申1536년 음서(蔭敍)로 조봉대부 공릉참봉(朝奉大夫恭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름을 받아 선무랑(宣務郞)에 증직되었다
【원문】
戊午士禍與乳母申氏轉到棠岳築舍于南門外古道村遯世不出如干文籍藏于縣西巖石窟中云 嘉靖丙申以蔭除朝奉大夫恭陵參奉不就承召贈秩宣務郞
卒가정(嘉靖)乙卯1555년6월20일 享年65세
配의인밀성박씨(宜人密城朴氏) 父는 현감(縣監) 벼슬을 지낸 영상(英祥)이다
生홍치(弘治)壬子1492년8월3일
卒가정(嘉靖)庚申1560년9월18일 育3男
墓해남읍 안동(安洞) 호산(葫山)서쪽 산기슭(下麓) 묘좌(卯坐) 쌍분(雙墳)이고 비석(碑石)이 있고 제각(祭閣)과 와가(瓦家)4채가 있다

 

55대

子 驥孫(기손)
字는 중운(仲雲)
號는 매헌(梅軒)
◎효성과 우애가 타고났었고 탁영(濯纓)과 더불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을 쫓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업을 크게 성취하였다 성종(成宗)壬寅1482년 백씨(伯氏 큰형) 제학공(提學公)과 더불어 알성과(謁聖科)에 나란히 급제하였고 벼슬은 한림 이조좌랑(翰林吏曹佐郞)을 지냈다 청요직(淸要職)에서 공적(功績)을 나라에 크게 떨쳤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현령(縣令)으로 나갈 것을 요청하였다 소광(疎廣 한 선제(漢宣帝) 때 태자태부(太子太傅) 소광(疏廣)이 부귀영화가 극에 달하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병을 칭탁하면서 자기 조카인 태자소부(太子少傅) 소수(疏受)와 함께 사직을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면서 황금 20근을 하사하고 태자는 50근을 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고향인 동해(東海)로 돌아가서는 날마다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며 노년을 즐긴 고사가 한서(漢書) 권71 소광전(疏廣傳)에 나온다)의 쌍관(雙官)에 연루되어 집안이 방랑하는 신세가 되어 자연속에서 평생을 보내시며 수(壽)를 다하셨으니 향년 38세이다
【원문】
孝友出天與季濯纓徃從佔畢齋門學業大就 成化壬寅與伯氏提學公聯壁謁聖科官翰林吏曹佐郞淸要聲續大闡郡國爲養乞縣竟坐疎廣雙官家食浪迹林泉以終天年 享年三十八歲
헌종(憲宗)2년壬寅1842년에 백동사(白洞祠)에 배향(配享)되었다
墓용인 포곡면 압고리(鴨皐里) 개곡(介谷) 자좌(子坐)이고 외조고묘(外祖考墓)측에 비석이 있다
◎탁영선생(濯纓先生)이 그 명(銘)에 이르기를
黃金第一名及第 황금이 제일이라 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靑春三十八浮生 38년의 청춘 부평초 같은 인생이더라
라고 하였다
【원문】
濯纓先生 題其銘曰黃金第一名及第靑春三十八浮生
配숙부인흥해최씨(淑夫人興海崔氏) 父는 직제학(直提學) 벼슬을 지낸 연(淵)이고 祖는 현감(縣監) 벼슬을 지낸 한(僴)이며 高祖는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지낸 강(康)이다
墓같은 언덕(同原)에 동좌(同坐)

 

54대

子 孟(맹)
字는 자진(子進)
號는 남계(南溪)
生태종(太宗)庚寅1410년8월1일
세종(世宗)戊午1438년에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3년을 넘겨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를 지냈다 단종(端宗)癸酉1453년 정난(靖難)으로 집현전교리(集賢殿校理)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성종조(成宗朝)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벼슬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셨고 일찍이 강호(江湖) 김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었고 포은(圃隱)·야은(冶隱)의 정주학(程朱學)을 들었으며 또 문장은 방촌(厖村) 황상공(黃相公 黃喜)의 문하에서 배워 도학(道學 유교 도덕에 관한 학문)에 밝아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매계(梅溪) 조위(曺偉) 선생과 도의(道義)로써 사귀니 강호(江湖)의 여러 어진 선비들이 그를 칭하여 노선생(老先生)이라 불렀다 예부운략 서(禮部韻略序)를 지으셨고 임금님 다섯 분을 차례로 섬기셨다
【원문】
成宗朝佐理功臣官至司憲府執義嘗師江湖金先生得聞鄭冶程朱之學又從文業於黃厖村相公之門道學高明與佔畢齋金先生梅溪曺先生爲道義交諸賢嘗稱曰老先生撰禮部韻略序歷事五朝
卒성묘(成廟)癸卯1483년9월11일 享年74세
墓청도군 상북면 수야산(水也山) 건좌(乾坐)이고 비명(碑銘)은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이 짓고 묘지(墓誌)는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이 지었다 중묘조(中廟朝)에 이조참판(吏曹參判) 겸경연춘추관사(兼經筵春秋舘事)에 증직(贈職)되었고 헌종(憲宗)2년壬寅1842년에 백동사(白洞祠)에 배향(配享)되었다
配정부인정씨(貞夫人鄭氏) 父는 집현전(集賢殿) 한림(翰林) 벼슬을 지낸 중처(仲處)이고 號는 어은(漁隱)이다 有1女
系配정부인용인이씨(貞夫人龍仁李氏) 父는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고 공조전서(工曹典書) 벼슬을 지낸 중순(中順)의 증손(曾孫)이다
生영락(永樂)甲辰1424년2월24일
현덕(賢德)이 있다
卒홍치(弘治)9년丙辰1496년閏3월29일 享年72세 生3子2女
墓같은 해 5월27일 공묘(公墓)의 왼쪽에 합폄(合窆)하였고 비석(碣)이 있다

 

53대

子 克一(극일)
字는 용협(用協)
號는 모암(慕菴)
生홍무(洪武)15년壬戌1382년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다 8세 때에는 어머니가 악성 종기로 고생할 때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었으며 아버지가 병이 났을 때는 변을 맛보아 병세를 관찰하였고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서는 6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호랑이가 항상 그 옆에서 보호해줌으로써 조석으로 상식을 하고 남은 음식을 먹이로 주어 가축을 기르 듯 하였다 그 사적이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에 실려 있다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덕(德)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날마다 소학(小學)을 강설하였고 벼슬은 어사대[南臺]의 천거로 통선랑 사헌부지평(通善郞司憲府持平)을 지냈다
【원문】
幼有至誠甫八歲母疽吮血父病嘗痢及丁艱六年泣血廬墓有虎常護其傍以奠餘飼之如養家畜事載三綱行實錄學於冶隱吉先生隱德不仕日講小學官通善郞司憲府持平南臺薦
卒경태(景泰)丙子1456년10월2일 享年75세
◎고향 마을 사람들은 사시(私諡 친지나 제자들이 지어 주는 시호)로 절효선생(節孝先生)이라 하였다 세조(世祖) 10년에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旌閭門)을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이 효문 신도비명(孝門神道碑銘)을 지으셨고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김좌명(金佐明)이 글씨를 썼고 제학(提學) 여의징(呂爾徵)이 전서(篆書)를 썼고 대제학(大提學) 조경(趙絅)이 발문(跋文)을 썼다 현종(顯宗)乙巳1665년9월25일 중훈대부 사헌부 집의(中訓大夫司憲府執義)를 증직받았고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신축(辛丑)년4월5일 사액(賜額)의 치제문(致祭文)을 받았다 또 남원(南原)의 월곡서원(月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아들은 맹(孟)이요 손자는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과 증손(曾孫)인 대유(大有)·대장(大壯)이 함께 나복산(蘿葍山) 선영 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에 모셔져 있다
【원문】
鄕人私諡曰節孝先生 世廟十年事聞旌閭佔畢齋金先生宗直撰孝門神道碑銘侍講院司書金佐明書提學呂爾徵篆大提學趙絅跋 顯廟乙巳九月二十五日贈中訓大夫司憲府執義享于紫溪書院辛丑四月五日賜額致祭又享南原月谷書院子孟孫駿孫驥孫馹孫曾孫大有大壯並享墓蘿葍山先塋下艮坐
配숙부인이씨(淑夫人李氏) 父는 한성판윤(漢城判尹) 벼슬을 지낸 동(동)이다
卒천순(天順)壬午1462년12월2일
墓쌍봉(雙封)이고 비석(碑石)과 갈석(碣石)이 있다
配숙부인경주이씨(淑夫人慶州李氏) 父는 참판(參判) 벼슬을 지낸 청(廳)이다
墓미상(未詳)

 

52대

子 湑(서)
◎태종조(太宗朝)에 추성익대좌리공신(推誠翊戴佐理功臣)으로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졌으니 그 사실이 회맹록(會盟錄)에 소상히 실려 있다 나복공(蘿葍公)의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처음으로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나갔는데 교화가 수 개월 동안 실행되어 신감(神鑑 임금님의 관찰력)이 사물에까지 미쳐 청렴결백하다고 칭송하였다 공(公)의 유풍을 들은 자는 모두 신군(神君 도가의 신)이라 칭송하였다 성품과 도량이 넓고 두터웠으며 벼슬과 영달을 추구하지 않았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판관공(判官公)을 모시고 와서 은덕을 베풀고 선업(先業)을 전승하였다 매번 자손들을 훈계하고 지극한 가르침으로 장려하여 이끌었다 관을 바로 쓰고 꼿꼿이 앉아 계산(溪山)에 의탁하여 거문고와 경서(經書)로써 읊조리고 노래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셨다 묘지는 군(郡)의 상북(上北) 풍각(豊角) 경계에 있는 나복산(蘿葍山) 인좌(寅坐)의 언덕에 있다 헌종(憲宗)8년壬寅1842년 백동사(白洞祠)에 배향되었다
【원문】
太宗朝推誠翊戴佐理功臣封盆陵君事實昭載會盟錄○賜版蘿葍公初以義興縣監化行數月神鑑及物淸白登頌聞公之風者皆以神君稱之性度宏厚不以干祿榮焉觧歸不久陪判官公而來種德貽業每以戒子孫奬導之至訓戴冠危坐嘯咏琴書寓溪山之樂以終餘年墓郡上北豊角界蘿葍山寅坐 憲廟二年壬寅享于白洞祠
配숙인밀양박씨(淑人密陽朴氏) 父는 충순내령(忠順內令)을 받은 천봉(天鳳)이다
墓같은 언덕(同原) 인좌(寅坐)
◎묘지의 풍수는 호점혈(虎占穴 산가(山家)의 점혈(占穴)에서 음택(陰宅)과 양택(陽宅)을 막론하고 터를 잡는 이론)로 고려(高麗)의 제도에 의거하여 석축(石築)을 쌓았다
【원문】
虎占穴依麗制石築
配숙인완산최씨(淑人完山崔氏) 父는 소윤(小尹) 벼슬을 지낸 득지(得之)이다
墓미상(未詳)

 

51대

子 伉(항)
字는 이정(而正)
號는 둔옹(遯翁)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生충숙왕(忠肅王)丙寅1326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유가(儒家)의 경전(經典)을 강론하고 연마하였다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은 도제고판관(都制庫判官)에 이르렀다 강예재생(講藝齋生)으로 일찍이 오산(鰲山)을 지나다가 그 시내와 산의 맑고 그윽함을 사랑하여 터를 잡고 별장(別莊)을 옮겨 지었다
【원문】
與圃隱鄭夢周同講磨理義登第官至都制庫判官講藝齋生嘗過鰲山愛其溪山淸邃因卜築移莊
卒1382년壬戌10월10일 享年57세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墓반장(返葬)하여 저소산(楮沼山) 선조(先兆)아래 신좌(辛坐)
配숙부인제주고씨(淑夫人濟州高氏) 父는 학사(學士) 벼슬을 지낸 지린(知麟)이다
卒7월17일
墓같은 곳에 상하분(上下墳)
◎공은 일찍이 강관(講官)으로서 이시중(李侍中)이 신하 노릇 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여 37차례나 차자(箚子 간단한 상소문)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公)은 이에 주부자(朱夫子 朱熹)의 둔옹(遯翁)을 취하여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리하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三十七剳奏 37회나 올린 상소
欲廣靈修聰 임금님의 총명을 넓히려 하였건만
雖(終)然四字論 마지막 사자론(四字論)도
不(恪)啻耳過風 귓등에 지나는 바람만도 못하였네
賴(用)季通筮 계통(季通 주자의 문인인 채원정(蔡元定)의 자 역법에 뛰어났었다 그의 호는 서산(西山)이다)의 점친 것 의뢰하여
末路稱遯翁 말년에는 둔옹(遯翁)이라 호를 지었네
寒泉一間舍 한천에 한 칸 집을 세운 것은
端合證(訂)泰(參)同 꼭 참동계(參同契 신선이 되는 글) 정하기에 합당하였네
【원문】
公曾以講官以爲李侍中有不臣之心上三十七剳子王終不聽公乃取朱夫子之遯翁爲自號焉是以南秋江孝溫有詩曰三十七剳奏欲廣靈修聰雖然四字論不啻耳過風賴季通筮末路稱遯翁寒泉一間舍端合證泰同

 

50대

子 文淑(문숙)
初諱는 문승(文昇)
字는 아숙(雅淑)
號는 명회재(明晦齋)
生충렬왕(忠烈王)癸巳1293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시경(詩經)을 강의하는 경덕재생(經德齋生)에 임용되었다 중국에 들어가 정명도(程明道)의 서적[經書]과 주희(朱熹)의 회암대전(晦菴大全 朱子大全)을 구매하여 돌아와서 유학(儒學)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사람들이 [정명도의 명과 주희의 회암에서 한 자씩 취해 명회(明晦)로써 그의 호(號)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벼슬은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지냈다
【원문】
中司馬補經德齋生入中國購得明道正書晦菴大全而還大有功於斯文人以明晦爲號焉官儒學提擧
卒충목왕(忠穆王)戊子1348년4월10일 享年56세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다
墓왕께서 예관(禮官) 백문보(白文寶)를 보내 저소산(楮沼山) 선영(先塋)아래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도록 하였다
【원문】
王遣禮官白文寶賜葬于楮沼山先兆下辛坐
配의인서산류씨(宜人瑞山柳氏) 父는 정승(政承) 벼슬을 지낸 경(璥)이다
卒병오(丙午)년8월9일
墓같은 언덕(同原) 상하분(上下墳)이다
역사(歷史)를 살피건대 경덕재(經德齋)는 고려(高麗) 예종(睿宗)4년己丑1109년에 국학사재(國學士齋)를 설치하고 그것의 명칭과 함의(含意)를 이르기를 : 주역(周易)을 강의하는 이택재(麗澤齋)·상서(尙書)를 강의하는 대빙재(待聘齋)·시경(詩經)을 강의하는 경덕재(經德齋)·주례(周禮)를 강의하는 구인재(求仁齋)·예기(禮記)를 강의하는 복응재(服膺齋)·춘추(春秋)를 강의하는 양정재(養正齋)·병서(兵書)를 강의하는 강예재(講藝齋)라고 하였다 대개 이때의 중요한 직책[要職]이었다
【원문】
按經德齋 高麗睿宗四年己丑置國學士齋其名義云易曰麗澤書曰待聘詩曰經德周禮曰求仁戴禮曰服膺春秋曰養正武學曰講藝盖時要職也

 

49대

管(관)
字는 희범(希範)
號는 정성헌(靖醒軒)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고려(高麗)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유학제거(儒學提擧)를 지냈고 전지(全誌)에 이르기를 호(號)는 정성(靖醒)이고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 국자사부(國子師傅)를 지냈다
卒충목왕(忠穆王) 을유(乙酉)1345년2월19일 享年96세
◎공훈(功勳)을 세워 조정(朝廷)에서 이인복(李仁復)을 보내 저소산(楮沼山) 신좌(辛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도록 명하였다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실기(實記)에 이르기를 「김관(金管)은 김해인(金海人)이다」 라고 하였다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벼슬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임금님께 여러 고을에 학교(學校)를 세워 학문을 가르쳐 유학(儒學)의 교화(敎化)를 펼칠 것을 요청[上奏]하였다
충선왕조(忠宣王朝)에서는 불교[浮屠]를 배척하여 만승회(萬僧會)를 혁파하려고 지은 시(詩)에 이르기를 :
如來萬眼皆妖鬼 부처의 만 개 눈알은 모두 요괴이고
至聖千言諟福神 공자의 천 마디 말은 복을 가져다주는 신이라네
若論邪正昭然處 만약 그릇되고 바름을 분명하게 논한다면
儒是需人佛弗人 유교의 유(儒)는 유인(需人)이니 사람이나 불교의 불(佛)은 불인(弗人)이니 사람이 아니네
라고 하였다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기에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공(公)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의 효문패(孝門牌)에 이르기를 「시조(始祖) 수로왕(首露王)이 나라를 열어서 10세(世)를 전하고 말왕(末王) 구해(仇亥)에 이르러서 그 땅으로써 신라(新羅)에 항복한 뒤 자손들은 모두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을 따랐고 옛 나라에 거주하는 후손들은 대대로 주리(州吏)가 되었으며 고려(高麗)에 이르러 이름이 관(管)이라는 자가 있어 비로소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조정에서 벼슬하였다」 라고 하였다
【원문】以勲勞朝命李仁復葬于楮沼山辛坐原安晦軒實記曰金管金海人也 忠烈王朝登第官版圖判書請於王設列邑學校大擧儒化 忠宣朝斥浮屠罷萬僧會有詩曰如來萬眼皆妖鬼至聖千言諟福神若論邪正昭然處儒是需人佛弗人王終不聽遂還田里佔畢齋金宗直撰公之玄孫克一孝門牌曰始祖首露王傳十世末王仇亥以其地降附新羅子孫皆從大角干金庾信後孫居故國者世爲州吏至高麗有名管始應科目登于朝云
配정부인나주임씨(貞夫人羅州林氏) 父는 대사성(大司成) 벼슬을 지낸 의충(宜衷)이다
墓묘지(墓誌)에 저소산(楮沼山)은 곧 저복산(楮福山)으로 김해부(金海府) 북쪽 50리정도에 있는 창원군 대산면 류등리(柳等里)이다
오랜세월 전쟁과 환란을 겪